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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내미의 관심사/컴퓨터 프로그래밍

보고 배울 사람들 : 오영준 대학원 미디어학과 박사님

by 엄마와 딸내미 2019. 5. 15.

   

"당당한 자신감을 기르세요!" 

[인터뷰송혜수 홍보팀 학생기자(문예창작 09), hyesoo11011@daum.net]

 지난 2012년도에 열린 제84회 본교 학위수여식은 그 어느 때보다 주목을 받았다. 국내 1호 청각장애인 박사가 탄생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대학원 미디어학과를 졸업하는 오영준 동문이다. 오 동문은 시종일관 밝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언론이며 사람들이 그를 주목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의 시간이 흘렀다. 무거운 타이틀을 뒤로한 채 그는 다시 어떤 곳에서 꿈을 펼치고 있을까. 숭실의 자랑, 오영준 동문을 숭실피플에서 만나봤다.

안주하지 않는 그

 오 동문은 현재 삼성전자 DMC(디스플레이, 가전, 무선, 의료기기, 솔루션 부분을 담당) 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에 있다. 어떻게 전자회사 내 책임연구원으로 들어가게 됐는지 묻자, 그는 “원래 DMC연구소에 갈 생각은 없었어요. 처음에는 대덕연구단지 ETRI(전자통신연구소)에서 근무하는 꿈을 가졌다가 카이스트 근무시절에 선배들이 삼성종합기술원에 근무하는 것을 보고 지원해보고자 했죠. 하지만 결국엔 회사로부터 DMC 연구소 근무배치를 받았습니다.” 회사 내부 규정상 자세한 업무에 대한 언급을 할 수 없다는 그였지만 본인의 일에 안주하지 않는 도전의식프로정신이 절로 느껴졌다.

 국내 1호 청각장애인 박사의 타이틀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부담은 느끼지 않고 개인의 영광, 숭실의 영광이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사회적으로 보면 타이틀을 인정한 거나 마찬가지죠.  제가 박사학위를 따기 전에, 한국교육제도가 완벽하지 않은 이유로  한국 국내 대학 박사학위를 수상한 농아인이 없었어요. 다행스럽게도, 올해 2월 저를 이은 두 번째 농아인국내박사가 나와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개인적으로 말하면, 농아인에 대한 사회 인식개선이 필요하기에 농아인 박사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청각을 잃다 

 그가 청각을 잃은 나이 고작 한 살이었다. 심한 고열로 인해 청신경이 손상된 것이다. 청각장애가 본인에게 있음을 언제 느꼈던 것일까. “부모님의 소리를 듣지 못하여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시작이었어요. 더 확실하게는 제가 보청기 착용 후에 청각장애인임을 알게 된 것이죠. 장애 발생이전에 청각학습(소리)을 거의 경험하지 못하여서 소리를 들어도 어휘를 분별할 수 없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학교’ 또는 ‘비행기’, ‘엄마’라는 어휘 소리를 들었지만 청각장애인의 입장에서 보면, 일직선을 긋듯이 분별이 안 되는 멜로디 소리만 느낄 뿐이었죠.”

  “지금은 TV 자막방송과 버스문자안내시스템이 실용되어 있지만, 1980년대 TV 방송 소리를 듣지 못하여서 TV 청취정보를 획득할 수 없었고, 버스 안내양의 음성소리를 들지 못하여서 정차할 정류장이름을 들 수 없었습니다. 시각적 행동에 의존함으로써 TV 캐릭터의 행동이나 화면 배경을 맨 눈으로 관찰하였고, 버스 창밖의 풍경을 많이 보아야 하였습니다. 저는 글을 거의 모르고 글을 이해할 수 없었던 때가 많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은 많아서 종종 서랍에서 형과 누나가 공부한 학습서를 꺼내 공부했어요.” 

 그는 서울농아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학교에서 ‘수화’가 아닌 ‘구화’를 배웠다. 몇 배나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는 ‘구화.’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구화를 배워도 학습 증진에 도움이 안됐어요. 오히려 수화를 사용하는 게 더 이해력과 관찰력이 좋아서 공부를 열심히 할 자신이 생겼어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구화를 전혀 사용하지 못하였죠.”

 그리고 문득 생각이 났다고 한다. “작년 10월에 만난 일본 농아인변호사 다몬 히로시씨는 말을 거의 하지 못하였음에도 츠쿠바대학교 부속 농아학교 재학 시에 수화를 배웠고 공부를 열심히 하여서 도쿄대학교 법학부를 거쳐 1995년 12월 일본 사법고시에 합격한 사례가 생각이 났어요. 또한 현재 일본 최대연구소 산업기술총합연구소(AIST)에 근무하는 농아인과학자가 일본수화학회 회장으로써 봉사하는 중인 것도 떠올랐어요. 그러니 오히려 수화는 두뇌 활동을 향상시키는 효과를 비롯한 여러 가지의 장점을 지니고 있다 말할 수 있었기에 저는 계속 수화를 사용했답니다.”

 

  컴퓨터에 빠지다

 장애로 인한 어려움이 분명 그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예민한 시기의 사춘기 시절 오 동문은 가장 힘들었던 예로 “사춘기 시설에 부모님, 외부인과 의사소통이 안 될 경우에 필담을 쓸 수밖에 없었어요. 대학진학 준비 시에 EBS 교육 방송을 들을 수 없어서 대입교재 등 학습지에 의존하여 스스로 공부했죠. 그 때 연구소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싶은 꿈을 가져보며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빠지게 됐어요.”

 마침내 그는 폴리텍대학과 성공회대 두 대학에서 정보통신학과를 졸업하게 된다. 남들은 하나 졸업하는 것도 버거울 텐데, 그는 다른 두 대학에서의 같은 전공을 이수했다.

“폴리텍대학이 노동부에서 설립한 직업훈련 특수대학의 특성으로서 이론보다는 기술이 기반된 실기지도와 직업훈련을 시행하였어요. 제가 폴리텍대학 재학 중에 프로그래밍실력이 뛰어난 이유로 성적이 우수함에도 이동통신에도 관심이 많아서 성공회대에 편입하기도 했고요. 물론 후에는 컴퓨터 내부구조를 공부하고 싶어서 숭실대 대학원에 오게 되었습니다. 지금 회사에서 연구하는 분야는  제가 배우는 전공으로부터 비롯되어 왔습니다.”

 그는 특히나 컴퓨터의 매력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직업으로까지 연결고리를 삼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베이직 시절이 생각나는데요.  베이직 프로그래밍 시에 다양한 규칙을  배워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짜고 결과 도출이 나오는 것이 정말 흥미로웠어요.”

 결국 그는 숭실대 대학원에 진학한다. 컴퓨터를 공부하기 위해. “석사시절에 숭실대 대학원 컴퓨터학과에서  장훈 교수님 지도아래 공부를 하였는데 제가 알기로는 숭실대 컴퓨터학과는 대외적으로 가장 유명하였고 숭실대 컴퓨터공학과 출신들이 컴퓨터 코딩을 잘하는 실력자, 시스템 분석이 뛰어난 사람, IT회사 관리자라는 인식을 받기도 했어요. 저희 회사에도 아는 숭실대 선후배들의 활약이 두드러져요. 제가 숭실대 출신인 것이 아주 자랑스러울 따름이에요.” 

 물론 대학원에서의 공부도 오 동문에게는 녹록치만은 않았다. “비장애인들과 함께 수업을 받을 때에는 교수님의 음성 내용을 거의 알 수 없었어요. 하지만 주변 학생들에게 교수님의 강의 내용을 물어봤어요. 실례가 있지만, 다른 학생에게 빌린 강의 노트를 복사하고 교재와 더불어 전공을 공부했답니다. 경우에 따라 좋은 점수 또는 보통의 점수, 좋지 않은 점수가 나오기도 했죠.(웃음)”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연구했다. 박사학위 취득 논문은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 인데 그에게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했다. “카이스트 인간친화 복지 로봇시스템 연구센터에 들어간 후에 장애인, 노약자를 위한  주거 공간 시스템(일명: 스마트 홈) 프로젝트에 참여하였고 다양한 장애인의 삶을 높이는(Qolt) 궁극적 목표를 추구하는 복지공학 연구를 수행하였습니다. 숭실대 대학원 미디어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해 인간-컴퓨터 상호 작용 분야의 연구를 함으로써 '장애인을 위한 다중 카메라기반의 지능형 공간'이라는 박사논문도 출판하였고요. 박사논문은 주거 공간에서 장애인들이 카메라 영상 화면에 증강현실상으로 중첩한 가상 센서로 실내 공간 장애물을 인식하고 충돌 없이 이동하기 위한 지능형 공간 서비스 시나리오를 구성하는 것을 설명합니다. 실제로 장애인이 공간상에 이동하기 어렵기 때문에 생활도우미 도움이 절실하지만  여건상으로 불편한 점이 여러 가지 있기도 했습니다.” 

 


장애인식 개선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

 오 동문은 장애를 통해 배운 것이 명확히 있다고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잖아요. 행복한 인생을 보내고 싶으면, 우선 근면과 성실이 받침 되어야 합니다.”

 

 숭실대 재학생들에게도 잊지 않은 말이 있는데, “재학생에게는 장애인에 대한 좋은 인식을 가짐으로써 긍정적 표시를 해주길 부탁합니다. 특히 수화를 배우는 사람이 많으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문득 추억이 떠올랐어요. 2001~2년 숭실대 수화 동아리 보임소리에 몇 번 참석하고 수화 몇 개 단어를 가르친 적이 있었어요. 어렴풋이 생각나네요.”

 장애인들에게는 “장애인은 일반인에게 동정을 받은 존재가 아닙니다. 장애인은 일반인과의 다른 차이를 갖는 존재입니다. 장애인은 자신의 장점을 능동적으로 지님으로써 훌륭한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당한 자신감을 기르세요!”앞으로의 꿈과 계획을 묻고 인터뷰를 마쳤다. “회사 정년퇴직이후에 고향 제주도에 내려가서 노후인생을 보낼 생각이 있어요. 고향은 늘 그리우니까요. 더불어 현재 박사의 사회적 책임으로써 청각장애인대학생과 청각장애인 사회인을 만나서 안생과 진로를 두고 멘토링 하겠습니다.”

 ‘국내 첫 청각장애인 박사’는 그를 설명하기에 부족한 수식어였다. 다음 큰 도약을 준비하는 그에게 자양분이 될 뿐. 더 큰 세상을 바라보는 오 동문의 눈과 귀가 앞으로도 계속 즐거워지기를 바란다.

  
 

오영준 동문은 폴리텍대학, 성공회대 정보통신학과를 졸업하고 본교 일반대학원 미디어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당시 국내 1호 청각장애인 박사 탄생으로 화제를 낳은 바 있다. 현재는 삼성전자 DMC 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며, 청각장애인들에게 큰 희망과 용기를 전해주고 있다. 이 글은 오영준 동문과의 필담을 통해 이뤄진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