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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내미의 관심사/컴퓨터 프로그래밍

보고 배울 사람들 - 김미진 교수님

by 엄마와 딸내미 2021. 4. 9.

김미진 교수님

김미진 교수님은 현재 홍익대 교수님으로 계신 분이다.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면서 자신만의 미술 세계를 견고히 만든 전문가였다. 원래는 부산대학교에서 미술교육학과를 전공하셨단다. 그 뒤로 프랑스에서 논문을 쓰시고 한국에 돌아와 다양한 전시 예술 활동에 참여를 하셨다. 1998년부터 홍익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서울시립대, 계원 예술대 등에서 강의를 시작하면서 교편에 나가신 것 같다.

그 이전에는 EcoTech 아트 프로젝트 대표, 대안공간 인더루프 전시자문, 월드컵 행사 깃발 미술 축제-바람의 시 예술위원, 경기문화재단 조각공원자문위원 등등 예술 관련된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도맡으신 경력이 있다. 현장에서 발 빠르게 움직이시는 활동적인 분이셨다. 


시대성 꿰뚫는 큐레이터 미술 담론의 지평 넓히는 김미진 교수

이처럼 김미진 교수(52, 홍익대학교)는 수많은 전시를 기획하면서 시대에 발맞춘 정체성을 찾아내려 노력한다. 그는 큐레이터에 대해 일상으로 집중된 소재들로부터 경향을 주도해내고, 시대를 보여주며, 새로운 미술의 창 역할을 해내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큐레이터 역시 예술가의 한 영역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늘 자신을 담금질하며 긍정에 이르는 새로운 목표를 만들어내는 김 교수를 만나 그의 미술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 교수에게 미술은 운명이다.

그 역시 미술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말한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의 손에는 그림 도구가 들려 있었다. 5살 무렵 집 앞에는 미대에 다니는 한 학생이 작은 창고를 개조해 작업실을 쓰고 있었는데 그곳을 찾아가 그림을 배워도 되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가 미술을 배우기 시작한 때다.

“혼자 야외스케치를 나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지금 어린 나를 생각해보면 스스로 찾아 그림을 그리기 위한 무언가를 했다는 것이 대견하기도 하다. 초·중·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미술부 활동을 했다. 풍경화를 베껴서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아직도 내 그림을 간직하고 있는 이웃이 있다.”

그가 자유로운 사고와 창의력을 갖게 된 데는 부모님의 교육관이 한몫했다. 또 60년대 초반, 흔치 않은 피아노를 사주며 예술성을 키워주려 했던 열정도 남부럽지 않다. 하지만,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려 했던 김 교수에게 부모님은 일반학과에 지원하기를 권하셨다. 내내 그림에 파묻혀 지내온 그는 낙방했다. 재수를 했고 부산대 미대에 들어가 캠퍼스 생활을 시작했다.

“1979년 당시 부산은 항구 도시 특성상 외국에서 들어오는 미술 관련 서적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일본과의 교류 덕에 한 발 먼저 문화를 습득할 수도 있었다. 우리나라 전반적으로는 구상미술이 주를 이뤘지만, 부산은 개념적 작업이나 설치미술이 움트고 있었다. 대학 생활을 하며 ‘황색벌판’이라는 그룹을 만들어 설치작업에 몰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교수님들께서 우리들의 작업에 터치를 하지 않으시고 이해해주신 것에 참 감사드린다.”

당시 민중미술이 아닌 것은 예술적 깊이나 작품성이 없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김 교수는 서구미술의 아류로 남지 않기 위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야겠다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그쳤다. 1984년, 유학이 자율화되면서 그는 유학길에 오른다.

“부산에 있었던 터라 서울에서 유학하나 프랑스로 유학을 가나 다를 것이 없었다. 당시 예술은 역사성을 내재해야 한다는 생각, 서양 회화의 본질과 당위성을 탐구해야 겠다는 열정이 있었다. 학비나 생활비 부분에서 서울 유학과 큰 차이가 없기도 했다.”

그는 외국에 나가면 일주일 만에 혀가 꼬부라지고 1년이면 저절로 언어가 습득될 줄 알았다고 웃으면서 말한다. 하지만 현실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남편은 에꼴 드 보자르로, 김 교수는 파리8대학에 들어가 조형예술을 공부했다. 언어의 핸디캡을 이겨내야 했기 때문에 아침 9시부터 자정까지 쉬지 않고 공부했고, 덕분에 1년만에 학부를 졸업했다. 그때 김 교수는 인생의 깊이를 더할 질문 하나를 받게 된다.

“누군가 내게 ‘너의 아이덴티티는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동양의 것, 내 뿌리의 갈급함에 대해 생각했다. 동양의 정신, 순환, 윤회 등을 연구했다. 또 박사준비과정을 거쳐 파리1대학에서 ‘동양적 정신적 체험에 의한 삶과 죽음의 인간의 이미지’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양에서 동양을 찾은 셈이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온 그는 광주비엔날레, 영은미술관, 예술의 전당 등지에서 큐레이터로 눈길을 끌었다.

1996년 광주비엔날레는 그를 세계의 중심에 세웠다. 유럽담당큐레이터로 활약하며 그는 뜨거운 세계 미술계에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냈다. 당시 비엔날레의 주제는 동양의 음양오행과 관련된 것이었다. 10년간 프랑스 유학에서 연구한 것들과 때마침 연결됐고 작품성은 물론 관객들의 발길을 이끄는 기획력은 관계자들 사이에서 수차례 회자됐다.

2001년부터 3년간은 광주 영은미술관 부관장으로 일했다. 늘 예산 부족 현상을 겪는 지역 미술관에서 관객수, 빠른 작업, 사회적 이슈의 보폭을 맞추며 새로운 기획, 자연 친화적인 미술관의 장점 등을 접목시켜 관람객의 호응을 유도해냈다. 그는 예산을 많이 두면 더욱 진지한 연구가 가능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또 젊은 큐레이터들의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중진작가들의 작품을 만나기는 힘들어졌다고 우려한다.

“젊은 세대는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재빠르게 움직이지만 중진작가들은 천천히 깊고 넓은 퀄리티를 형성해가고 있다. 따라서 중진작가들이 설 무대도 점점 사라지고, 젊은 작가들과의 간극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중진 작가들이 소외되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했다. 이제는 개인의 깊이를 인정해주는 것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또 지금의 젊은 작가들이 40~50세가 됐을 때도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그 초석이 마련돼야 할 거라 생각한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김 교수는 교수로, 전시기획자로 자신만의 확고한 영역을 구축했지만 여전히 자신을 다그친다. 과거의 것을 탐구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데 주저치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배움이 필요하다는 것.

“눈에 안 보이는 부분을 보이게 하는 것이 큐레이터다. 보이는 것도 평가하기 어려운데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다룬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같은 어둠이라 할지라도 큐레이터는 작품 안에서 절망을 위한 절망과 희망을 위한 절망을 구분해 보여줘야 한다. 예리한 판단으로 의미를 여과해내 발전적이고 희망적인 면을 보여주고 삶의 의욕을 주는 부분을 조명하는 매개자 역할을 하고 싶다.”

전시, 예산, 작가들과의 협업에도 좋은 에너지가 흘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김미진 교수. 더 자신을 들여다보고 단속해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라는 그 열정이 김 교수의 인생을 감동적인 작품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김미진 교수 약 력

▲학력

·1996 국립파리1대학교, 팡데옹-소르본느 조형예술학 박사, 파리

·논문: 동양적 정신적 체험에 의한 삶과 죽음의 인간의 이미지

·1989 국립파리1대학교, 팡데옹-소르본느 조형예술학 박사준비과정, 파리

·1988 국립파리8대학교, 생-드니 조형예술학부, 석사 파리

·1987 국립파리8대학교, 생-드니 조형예술학부, 파리

·1983 국립부산대학교, 미술교육학과, 부산

▲경력

·2008~2010 예술의전당 전시예술감독

·2007 세오갤러리 자문위원

·인천국제여성비엔날레특별전 커미셔너

·2004~2006 세오갤러리 디렉터

·2006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출강(예술기획, 예술경영 과목)

·2002~2005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겸임교수(예술기획, 예술경영 과목)

·2001~2004 영은미술관 부관장

·2000~2001 오르세 미술관 한국전 아트디렉터

·1996~1997 광주비엔날레 유럽담당 큐레이터



▲전시기획

·2006 송번수 개인전 ‘크로스오버 2006’

·2005 이만익 개인전 ‘크로스오버 2005’

·2004 김기철 개인전 ‘크로스오버 2004’, 세오갤러리

·영은레지던시 ‘나는 너와 같이 너는 나와 같이’전, 영은미술관

·2003 미셀 블롱델이 ‘메두사의 눈’전, 영은미술관

‘그리는 회화-혼성회화의 제시’전, 영은미술관

영은레지던시전 외 26회

▲현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교수



[출처] 경기신문 (https://www.kgnews.co.kr)

 

 

동서양의 화합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다는 점, 그리고 앞으로 미래 작가들을 위해서 중견 작가들의 자리를 마련하고자 현재에도 다양한 활동을 하시는 그분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이런 분들이 만하서 우리나라의 미술은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을 것 같다.

 

참고 자료

홍익대 미술대학원 홈페이지 : cfa.hongik.ac.kr/index.do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cfa.hongik.ac.kr